경주시 '구황동 황복사터 동쪽 7~8세기 고분터' 미완성인채 버려진 가릉(假陵) 추정

입력 2017년02월09일 14시19분 백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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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초 5년만 재위하고 병으로 숨진 뒤 화장된 효성왕(재위 735~742)이 원래 주인일 것이라는 추정....

사진 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
[여성종합뉴스] 9일 경주시 구황동 황복사터 동쪽 보문들에 널브러진 무덤 석재들과 함께 전해져온 7~8세기께의 고분터 추정 유적이 베일을 벗었다.

그동안 황복사의 목탑터인지 왕릉인지, 왕릉이라면 누구의 것인지를 놓고 수십여년간 학계의 설왕설래가 이어져온 이 유적이 최근 발굴조사 결과 거대 왕릉으로 쓰려고 만들다가 중단되어 미완성인채 버려진 가릉(假陵)으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이 무덤은 통일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초 5년만 재위하고 병으로 숨진 뒤 화장된 효성왕(재위 735~742)이 원래 주인일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해 더욱 주목된다.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구황동 황복사터 동쪽 고분추정터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효성왕 무덤으로 조성하려다 중단한 것으로 보이는 왕릉의 석재들과 이후 무덤자리에 조성된 2기의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담장, 배수로, 도로 등의 유적을 확인했으며, 막새, 기와, 전돌, 등잔 등 유물 300여점도 함께 수습했다고  밝혔다.

연구원 쪽은 실체를 놓고 논란이 제기되어온 무덤 석재들을 발굴해 분석한 결과 십이지신상 등을 새기기 위해 다듬은 특유의 조형 방식이 성덕왕과 경덕왕 재위 사이의 8세기초로 파악돼 효성왕의 무덤용 부재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전했다.

또 석재가 남아 널려있던 자리는 원래 왕릉터가 아니라 이 석재를 재활용해 지은 후대의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이며 유적 북동쪽이 왕릉 자리로 추정된다며 논두렁 등에 일부 남아있던 기존 석재와 발굴로 새로 드러난 석재를 조사한 결과 신라 성덕왕(재위 702~737) 이후부터 왕릉에 쓰인 석재와 동일한 형식이고, 크기나 제작 방식도 기존 왕릉과 거의 같았다고 한다. 발굴된 석재 일부인 갑석의 곡률을 계산해 어림잡은 왕릉의 직경(지름)은 약 22m 정도로 전 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수치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원래 무덤을 쓰려했던 이는 효성왕이 유력하다고 조사단은 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효성왕은 그의 유언대로 관을 법류사 남쪽에서 화장해 동해에 뿌렸다는 기록이 나오고, 5년간의 짧은 재위기간까지 고려하면, 병석에 있을 때 묻힐 능침을 준비하다 유언으로 화장을 택하자 짓던 무덤과 석물을 방치하게 됐고, 후대 자연스럽게 황복사터 금당터의 면석과 능지탑의 탱석, 현재 발굴터의 건물터에 재활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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